의순공주 이야기

의순공주 이야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의 여인들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신붓감으로 삼겠다며 종친이나 왕족의 딸들까지도 요구하는데요. 때는 1650년 효종 1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은 부인이 사망했다며 사신을 통해 조선의 공녀를 계비로 맞이하겠으니 준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조선은 청나라 도르곤의 요청에 의해 '의순공주'를 시집보냅니다.

 

 

의순공주가 된 사연

의순공주는 진짜 '공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조선 9대 성종의 4대손 이개윤(李愷胤)의 7남 4녀 중 한 명이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공주가 되었는지 그 사연과 기구한 생애 스토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50년 3월 청나라 실세였던 도르곤이 자신의 신붓감으로 조선의 공주를 요구합니다. 당시 청나라 왕족들은 국혼을 통해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속셈으로 속국이었던 조선과 몽골의 여인들을 부인으로 삼으려 했다고 하는데요. 청나라는 이미 이전에도 조선에 여러 차례 공주와 시녀들을 요구했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 도르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고민에 빠집니다.

의순공주의순공주 남편 도르곤
의순공주(한국전통굿보존진흥회카페)와 도르곤(위키디피아)

 

효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무려 1남 7녀. 청나라에서 효종이 딸부잣집인걸 알고 계속 공주를 요구했던 것일까요?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자신의 딸들을 보내기가 싫었습니다. 자신의 딸은 아직 혼기가 차지 않았거나, 이미 혼기가 차서 혼인한 상태라고 거짓보고를 합니다.

의순공주를 청으로 시집보낸 딸부자 효종의 가계도
조선 효종 가계도ⓒ마이로그

 

그러던 중 먼 왕족의 딸을 찾아냅니다. 금림군(錦林君) 이개윤의 딸을 청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녀를 양녀로 삼아 '대의(大義)의 순종(順從)한다'는 뜻의 의순공주라는 작위를 내려주고, 그녀의 아버지와 두 오빠에게는 벼슬을 내려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의순공주의 본명은 이애숙(愛淑). 당시 나이는 고작 16세였습니다.

성종 이혈 - 봉안군 이봉 - 흥원군 이경 - 기성군 이현 - 금림군 이개윤(서자) - 의순공주
의순공주 이애숙의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은 성종과 후궁 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익양군의 후손이며, 익양군의 이복형 봉안군의 양증손이다. 가계도에 따라서 이개윤은 혈통상 효종에게는 10촌 종조부이고, 의순공주는 효종의 11촌 고모뻘인데, 효종의 양녀가 되었으니 이는 항렬을 따지지 않은 비정상적인 입적이다. (출처 나무위키)

 

 

 

청으로 시집가다

도르곤은 산해관 근처까지 의순공주를 마중 나왔고,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도르곤의 나이는 39세, 의순공주와 무려 23살의 차이가 났음에도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청으로 시집간 의순공주와 도르곤은 행복하게 잘 살 줄 알았는데, 불생 하게도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사망하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설이 많다고 합니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비(妃)가 된 지 7개월 후인 1659년 12월 31일 도르곤은 만리장성 근처 카라호툰에서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도르곤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사였다. 하지만 그가 섭정을 하면서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선황(홍타이지)의 부인, 즉 형수인 효장문황태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만주족 고유의 형사취수(兄死娶嫂) 제도를 따른 행위였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교에 심취한 순치제로서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도르곤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조선에서 새 부인을 얻게 되자 17세의 순치제로서도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도르곤이 죽고 그의 집에서 황제가 입는 황포(皇袍)가 발견되었다. 친정에 나선 순치제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역적으로 몰아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렸다.

여하튼, 도르곤이 죽자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부하 보로(博洛)의 첩실이 됩니다. 시집간 지 7개월 만에 남편이 죽은 충격으로도 모자라 재혼까지 하게 된 것이죠. 이후 의순공주에게 불행은 계속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새 남편 보로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인데요. 다시 과부가 된 의순공주는 청나라에 남아 험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편, 사신으로 청을 오고 가던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은 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치제에게 청하여 딸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옵니다. 나라를 떠난 지 7년 만에 다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돌아온 의순공주는 효종이 정기적으로 쌀을 내리는 등 예후를 받아 생활합니다.

하지만,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현종이 집권한 뒤 의순공주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게 됩니다. 더는 의순공주라고 쓰지 않고 '이개윤의 딸'이라고 썼으며, 오랑캐에게 시집을 갔고 남편의 사후에 수절치 않고 이내 재가까지 했다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오히려 청나라에서 받았던 예우보다 처지가 나빠진 것입니다. 결국 고향으로 귀국 후 5년 만인 28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는 의순공주가 귀국 후에도 도르곤을 그리워하다가 무당을 불러 귀신이라도 만나기를 고대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요. 도르곤과의 짧은 부부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순공주 묘역 (족두리 묘)

의순공주 묘의순공주 묘역
의순공주의 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현재 의순공주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묘를 '족두리 묘'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요. 의순공주가 청에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유품인 족두리만 겨우 건졌다는 야사의 내용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의순공주 묘의 보존상태는 엉망이라고 하는데요. 심지어 조만간 도로공사나 아파트 공사로 없어질 전망이라고 하네요.

 

의순 공주의 한 많은 삶. 영화'조선 마술사', 뮤지컬 '의순공주', 소설 '애숙의 나라', '의순공주' 등의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가여운 삶 가운데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 하루였습니다. 지금까지 의순공주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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